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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서니

민족주의자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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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사람들에게 '국부' 라고 불리는 이승만도 아니요, 백범과 함께 방북하여 김일성과 담판을 지으려 했던 김규식 선생도 아니다. 바로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몽양' 여운형 선생이다.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우리의 역사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념과 사상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한계 속에서 몇몇 민족 지도자들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점점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고는 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몽양 여운형' 이다. 열렬한 독립 운동가이자 뛰어난 민족 지도자였던 여운형은 정파와 이념을 초월해서 민족의 이익만을 위해 일했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나 이런 커다란 족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익과 우익, 그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았기에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역사 속에서 잊혀 가고 있다. <몽양 여운형 평전> 을 쓴 전병준은 여운형을 일컬어, "미군정에 드나들었지만 그렇다고 친미파는 아니었고, 북한을 방문했지만 친소파나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다. 오직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위해서 사상을 초월했던 민족주의적 정치인이었다." 라는 말로 그의 정체성을 대변하기도 했다.

  여운형의 삶은 대체적으로 해방 전후를 기준으로 나눌 수 있다. 해방 전 그는 상해 임시정부의 실질적 지도자로서 일제에 맞선 독립 운동을 열렬히 지지하고, 신한 청년단을 조직하여 2.8 독립선언과 3.1 운동을 후원하는 적극성을 보인 독립투사였다. 특히 몽양이 일본에 직접 방문하여 정열적인 회담과 연설을 통해 독립의지를 재확인 시키고 민족의 위상을 드높였던 일은 그의 독립 운동 활동 중 백미로 손꼽힌다.

 1919년, 일본은 몽양을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온건주의자로 잘못 파악하고 일본에 정식 초청한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과 달리 몽양은 오히려 일본의 식민지배를 통렬히 공박하고 조선의 즉시 독립을 주창하는 한편, 제국 호텔에서 수백 명의 신문기자들과 동경 유학생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펼쳐 국내 뿐 아니라 해외 교문들의 독립 의지를 고취시키는 크나큰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10여 차례에 걸친 일본 고관들과의 회담과 연설을 통해 일본을 수세로 몰아넣은 몽양의 이러한 '일본 내 독립운동' 은 일본 의회 내에서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고 그 때문에 당시 하라 수상은 2월 28일 중의원을 해산할 정도로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받았다. 이처럼 그는 적의 심장부에 들어가 그들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줄 정도로 과단성 있고 열정적인 독립 운동가였다.

 그 후, 30여년 가까운 세월 동안 몽양은 옥고를 치루기도 하는 등의 고초를 겪었으나 독립의지를 꺾지 않았고,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이 되어 손기정 일장기 말소를 비롯해(동아일보가 아니라 조선중앙일보가 최초) 여러 가지 문화 계몽운동을 펼치는 한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해 항일투쟁 및 건국준비 사업에 전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에 몽양은 어떤 활동을 했을까. 그는 1945년부터 1947년까지 좌익과 우익,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끝까지 '좌우합작' 을 통한 민족 통합을 주장하는 통일론자로 변신했다. 그는 "설혹 남조선에만 단독 정부가 실현된다면 그 결과는 조선 민족을 분열로 오도할 것이며, 그런 형태로 1~2년만 경과한다면 10년이라도 고칠 수 없는 민족분열의 원인이 될 것이다." 라는 말로 좌우 합작을 기반으로 한 통일 정부 수립을 끝까지 고집하였다.

 그는 다섯 차례의 방북을 통해서 북한과 남북합작을 위한 사전 조율을 어느 정도 끝낸 뒤, 남한 내에서의 좌우합작을 남북합작으로 끌어 낼 수 있는 거시적이고 구체적인 계획들을 발표, 실천했다. 이 부분이 바로 해방정국에서 여운형이 보인 가장 탁월한 면모이자, 그만이 감당할 수 있는 활동이었다.

 그는 미군정과 접촉하면서도 북한을 방문했고 우익에 가까워 보이면서도 그만큼 좌익과도 친밀한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었다. 몽양의 이러한 정체성은 우익에게는 "실속이 없다", 좌익에게는 "아름다우나 쓸모가 없다." 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는 정파와 이념을 초월해 민족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세력과 손을 잡아도 나쁘지 않다는 진정한 '실속파' 였다.

 그러나 이념을 초월한 몽양의 이러한 활동은 좌우 양쪽 모두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고 그를 제거하기 위한 양측의 테러가 2년 동안 무려 12번이나 이어져 결국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혜화동 로터리에서 그의 목숨을 앗아가고야 말았다. '좌우합작' 을 통한 민족통일전선에 온 힘을 다했던 그의 죽음은 곧 민족 분열의 역사와 분단의 아픔을 암시했고 그것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역사에 가정이라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과연 그가 끝까지 살아 있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움직였을까? 확실한 것 한가지는 몽양 같은 걸출한 정치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우리에게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

 

 
 여운형은 그 어느 정파, 그 어느 이념에도 휩쓸리지 않는 타고난 민족주의자였다. 그에게 있어서 이념과 사상은 민족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수단' 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의 활동은 일반적인 노선이나 이데올로기의 틀에 가둬 놓을 수 없는 방대한 것으로써 그는 자신의 최종 목표인 '자주적 통일국가' 의 실현을 위해 모든 상황에 유연하고 포용성 있는 태도로 일관했다.

 몽양의 이러한 '유연한 합리성' 은 최근 우리 시대 정치에 큰 교훈을 준다. 지금 우리의 정치는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로 갈라져 서로를 헐뜯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서로를 헐뜯음으로써 대권 수호, 정권 교체에만 관심이 있는 그들의 정쟁이 국민들의 민생과 점점 괴리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시대 정치인들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이익의 총합은 조선민족의 이익의 총합보다 크지 않다." 던 몽양의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 익의 좌우를 가르지 않고 모든 사상과 이념을 민족이익, 민족해방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하고 받아들였던 그의 자세야 말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고 역사는 흐르지만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

 몽양의 숭고한 민족애, 뜨거웠던 열정이 바로 그러한 것일 것이다. 과거에 그들이 단순히 좌익이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적 원류가 북한 쪽에 더 가깝기 때문에 지금까지 외면 받았다면 지금부터라도 그러한 사상적 틀을 부수고 조금 더 진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 개성이 살아있는 사회를 외치면서 역사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 단 하나의 신념만을 강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

  나는 역사 교과서에 좌익 쪽 인물이 등장한다고 해서, 고액권 화폐에 여운형이 등장한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정체성이 흔들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좌익과 우익의 다양한 가치가 충돌했던 그 시대의 올바른 역사를 보여주면서 생각할 수 있는 힘,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부여하고 제시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시대가 바뀌면 역사는 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었던 변하지 않는 가치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좌우를 가르지 않고 모든 사상과 이념을 초월했던 민족 지도자의 변함없는 가치를 담아내는 일, 이것이 바로 우리 역사를 가장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닐런지. 오직 한 평생 변함없는 신념으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 왔던 몽양 여운형, 민족을 향한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아직도 쟁쟁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왜들 우느냐, 무엇이 서러우냐, 어서 행진을 계속하라! 용감하게 나아가라! 나는 죽지 않았다."